여러분들은 정확하게 ‘음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단순히 ‘음높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음치라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오늘 최유준 음악평론가와 함께 만날 영화 <사운드 오브 노이즈> 이야기를 듣는다면 음치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음악은 이러저러한 것이다’ 라는 알 수 없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음악적 치유를 도모하는 6인의 음악테러범과 음치이자 음악혐오주의자인 형사 아마데우스의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까요?

 

각각 음악과 미술을 전공한 올라 시몬손과 요하네스 슈테르네 닐슨은 2001년에 독특한 형식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여 유튜브에 공개했다. <한 아파트와 6인의 드러머를 위한 음악>이라는 제목의, 영화라고 해도 좋고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아래의 유튜브 동영상은 9분 31초 분량의 작품 전편이다).

 

Video“Music for One Apartment and 6 Drummers”(2001)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아파트에 숨어 들어가 온갖 가재도구를 이용하여 소리를 내고 음악을 만든다는 설정이다. 이 단편영화에서 그려지는 범죄가 기껏해야 무단 가택침입 수준에 그쳤다면, 9년이 지난 후 6명의 배우(연주자)를 그대로 출연시킨 <사운드 오브 노이즈>(2010)에 이르러서는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테러 수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사운드 오브 노이즈>는 단편영화 <한 아파트와 6인의 드러머를 위한 음악>의 단순한 확장판이 아니다. 단편영화에는 없던 새로운 주인공을 등장시켜 ‘테러범의 뒤를 쫓는 형사’라는 내러티브를 완성시켰는데, ‘아마데우스’라는 상징적 이름을 가진 이 형사의 캐릭터가 영화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세계적 지휘자로 활약하는 자신의 친동생을 비롯해 온 가족이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들이며, 그러한 가족 분위기에서 모차르트의 이름까지 덤으로 얻었지만 그는 갈데없는 음치에 음악혐오주의자인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음치가 탄생하는 메커니즘을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다. 음치란 무엇일까? <뮤지킹 음악하기>의 저자 크리스토퍼 스몰은, ‘음치’가 말 그대로 ‘음높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세상에 음치란 있을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가 청각장애인이나 언어장애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음성학적으로 볼 때, 모음을 구분(예컨대 ‘ㅏ’ 소리와 ‘ㅓ’ 소리를 구분)하여 듣는 것만 해도 음악에서의 음높이보다 더 정교한 음높이 구별 능력이 요구된다. 말하자면 모음 구별과 발화만 제대로 할 수 있다 해도, 그는 음치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노래방에서 간혹 발견되는 그 음치들은 누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스몰의 답변은 실제 ‘음치 클리닉’으로 수백 명의 음치들을 교정한 내가 만난 어느 음악전문가의 임상적 경험과 일치한다. 그들은 성장기에 크고 작은 음악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의 반 대항 합창대회 연습 상황에서 입상에 눈이 먼 선생님은 음을 곧잘 틀리는 한 아이에게 말한다. “철수야 너는 입 벌리는 시늉만 해라”.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철수도 멋쩍게 함께 웃어 보지만, 그는 이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음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 있는 ‘음치 클리닉’ 선생님은 상담을 통해 그 트라우마의 순간을 무의식에서 불러내고 그 상처를 치유한다.

 

 

음악을 혐오하는 아마데우스는 영화에서 도시 전체를 연주회장과 악기로 삼겠다는 6인의 테러범들을 쫓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들과 화해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음치가 치유되는 순간인데, 이 순간은 역설적이지만 아마데우스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작곡행위를 통해) 도시의 음악 테러에 가담하는 대가로 침묵의 소리를 얻는 모습으로 은유된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설정되는 음치가 단순히 아마데우스 형사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데우스의 강박관념은 사실상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음악은 이러저러한 것이다’, ‘음악가는 이런저런 사람이다’(너 따위가 넘볼 생각도 마라) 라는 관습적 사고와 주입식 교육 속에서 우리의 음악성은 석화되고 음악가로서의 잠재력은 퇴화되어 왔다. 알 수 없는 강박 속에서 우리 모두는 음치가 된 것이다.

 
 

 

<사운드 오브 노이즈>는 음치가 된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음악’에 대해서 충격을 가하는, 그럼으로써 경직된 음악적 사고로부터 깨어나는 음악적 치유를 도모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 치유가 실제의 관객들(우리 음치들)에게 효험을 나타낼지는 의문이다. 이 음악의 테러리스트들조차 버리지 못하는 저 메트로놈의 딸깍이는 소리, 그 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그 소리가 최소한의 리듬을 부여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소리에 정교하게 맞추어 음악을 연주하는 그들은 여전히 우리 같은 음치들은 넘보지 못할 경지에 있으며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음악 테러리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르떼365 최유준 음악평론가

글쓴이_ 최유준 (음악평론가)

서울대와 동아대에서 음악미학과 음악학,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월간 객석> 등의 지면을 통해 음악평론가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사업단에서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악과 대중문화를 주된 텍스트로 삼아 사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비평적 노력을 해왔다. 저서로 『음악문화와 감성정치』,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지식인의 표상』, 『비서구 세계의 대중음악』, 『아도르노의 음악미학』, 『뮤지킹 음악하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