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자들은 신화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거는 이상적 세계였다고 말합니다. 과거가 이상적 세계였다는 말은 현재는 과거에 비해 나빠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데요. 그리스 작가 헤시오도스 역시 인간의 미래는 결국 점점 잊혀져가는 퇴보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과거보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주창하며 이전과 다른 과거와 미래에 대한 해석을 내놓은 예술가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초에 등장한 미래주의자들입니다. 오늘은 예술가들이 말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김남시 문화예술이론가와 함께 알아봅니다.

 

많은 신화들은 인류 역사를 최초의 이상세계가 타락하고 퇴보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성경의 에덴동산과 원죄 이야기도, 그리스 신화도 그렇다. 헤시오도스는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지배하던 시기를 ‘황금기’, 그 시대 인간을 ‘황금족’이라 불렀다. 황금족들은 전쟁도, 불화도 모르고 살았으며, 그들의 육체는 늙고 병들지 않았다. 이상적 환경과 기후 덕택에 옷을 입지 않고도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고, 자연이 모든 양식들을 제공해 주었기에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은 동물과 서로 소통할 수 있었고,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먹이가 되는 일도 없었다.

 

이런 이상적 세계가 과거에 있었다는 말은 현재는 그보다 못해졌다는 뜻이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시대를 인간은 고역과 비참함, 전쟁과 불화에 시달리고, 아이는 부모를 거역하고, 형제는 다투고, 주인과 손님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른 채 악행을 저지르고 거짓이 선으로 통용되는 ‘철의 시대’라 불렀다. 인간의 역사란,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깨어지고, 인간의 선한 심성은 타락하며, 진리는 잊혀져가는 몰락의 역사였던 것이다.

 


<The Artist Moved by the Grandeur of Antique Fragments>,
John Henry Fuseli

인류의 역사가 퇴보하고 있다면, 인류가 창조하는 예술도 같은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지로, 근대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당대의 예술은, 조화와 순수성을 지니던 이상적인 고대 예술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독일 미학자 요한 빙켈만은, 예술창조의 근본인 좋은 취향은 ‘고대 그리스의 하늘 아래서’ 처음 형성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고,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미적 이상은 그 시기 예술에서만 온전히 구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자연과 깊은 조화와 통일 속에서 살던 인간의 자유로운 심성과 정신의 산물을, 그 모두를 상실한 시대의 예술이 어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1780년 하인리히 퓌슬리가 그린 <고대 잔해의 위대함 앞에서 절망하는 예술가>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당대 예술가의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초 이런 역사인식을 거부하는 급진적 예술가 그룹이 있었다. 미래주의자들이었다. 1909년 피가로 지에 실린 이들의 선언문을 읽어보자.


 

 

“진실로 나는 그대에게, 매일 박물관과 도서관, 학술원을 드나드는 것은,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오랫동안 부모의 후견 아래 있어서 재능과 야심찬 의지를 마비시키는 것만큼이나 유해한 것이라고 천명한다. 그것은 죽어가는 자, 병든 자, 갇혀있는 자에게는 편안할지 모른다. 미래로의 길이 막혀있는 자에게 감탄할만한 과거는 그의 불행에 위안을 줄지 모른다…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 젊고 강인한 미래주의자들은! 검댕이 묻은 손가락을 가진 즐거운 방화자들을 도래하게 하라! 여기 그들이 있다…어서 오라! 도서관 서고에 불을 질러라! 운하의 물길을 박물관으로 돌려 홍수를 일으켜라!..오! 오래되고 명성 있는 그림들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탈색된 채 물 위에 떠도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여!…곡괭이를 들어라, 손도끼와 망치를, 그리고 부숴라, 고색창연한 도시들을 부숴라, 무자비하게!”


 

이들은 도서관, 박물관, 학술원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전통에 불을 지르고, 물에 떠내려 보내려 했다. 비행기, 자동차, 기관차 같은 새로운 기술들은 인류의 역사가 퇴보가 아니라 진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도, 과거의 문화와 예술을 이상화하는 “과거주의”는 미래로의 열망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느리고 갑갑한 과거와 그 고루한 이상을 파괴하는 테크놀로지의 속도와 도시적 감수성을 미래주의적 예술의 원천으로 삼았다.

 

아무리 애써도 과거의 위대함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은, 모든 현재의 노력들이 결국 과거의 불완전한 반복에 불과하다는 체념을 낳을 것이다. 진보된 기술을 갖춘 미래가 현재를 낡고 고루한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 역시, 새로움을 향한 현재의 시도를 위축시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둘 다 현재를 긍정하지 못한다. 각 시대의 위대한 예술은 자신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감성에 기초하고 있다.

 


김남시 문화예술이론가

글쓴이_ 김남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과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과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감성을 통한 세계 인식이라는 미학 Aesthetics 본래의 지향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권력이란무엇인가』,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노동을 거부하라』,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