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은 고전이다. ‘디자인’ 개념에 숨어 있는 르네상스 미술과 과학의 관계 _정수경 미술이론가

요즘은 디자인이 미술의 한 분야로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는데요. 사실 디자인은 그 근원이 과학자들의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이자 더 나아가서는 중세 기독교 신학의 자연관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학문 간 ‘융합’이 시대정신의 키워드로 대두되고 있는 현 상황에 비추어 보면, 디자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신학과 과학 그리고 미술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융합’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오늘은 정수경 미술이론가와 함께 ‘디자인’ 개념 속에 숨어있는 ‘융합’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다양한 인간 활동들 사이의 ‘통섭’, ‘융합’이 우리 시대정신의 키워드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야 마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듯, 그간 이질적이고 독립적인 분야들로 간주되었던 많은 학문과 활동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다. 반가운 일이지만, 그렇게 유난 떨 만큼 새로운 일은 또 아니다. 실은 여러 활동들을 유사성보다는 차이에 따라 분절하고 독립시켜 분과학문들로 분리해낸 것이 고작 19세기 들어서의 일이었을 따름이다. 그 이전까지 융합과 통섭은 슬로건이 될 필요가 없으리만치 편재되어 있었다. 철학과 자연과학, 신학 등 지금은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다양한 활동들이 보다 포괄적이고 큰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술에 포함되는 회화, 조각, 건축 등의 개별 활동 말고 ‘미술’ 개념 자체가 생겨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였다. 이 ‘미술’ 개념의 탄생 장면이야말로 미술과 과학이 융합되었던 고전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 1487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줄곧 손기술(mechanical arts)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어온 회화, 조각의 종사자들은 회화, 조각을 손기술과 대비되는 가치 있는 인간 활동으로서의 리버럴 아트(liberal arts)에 편입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정신적 활동인 리버럴 아트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회화, 조각의 모방 대상인 이 세계의 조형 원리(이데아; Idea)를 파악하고, 그것을 회화, 조각에 구현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했다. 하여 르네상스의 야심찬 화가, 조각가들은 단순히 대상의 외양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세계의 조형 원리를 간파하기 위해 수학, 천문학, 해부학, 골상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인체 묘사에 원리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거한 황금률을 이용했고, 체계적인 공간 묘사를 위해 원근법을 고안해내었다. 이 두 가지 수학적 원리들은 화가와 조각가의 활동들을 단순한 손기술을 넘어 정신을 사용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했고, 위에 언급한 모든 방면에서 탁월함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화가를 ‘천재’로 불리게 해주었다.

 

 

알베르티의 원근법 모형

 

그러나 거기서 바로 ‘미술’ 개념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미술 개념은 디자인 활동과의 유사성을 통해 수립되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디자인이 당연히 미술의 한 분야이지만, 당시에 디자인은 화가, 조각가들의 활동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아니, 좀 더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디자인은 중세 기독교 신학의 자연관에서 유래한 개념이었다.

 

중세 초중반의 자연관은 에덴동산의 상실 이후 최후의 심판을 향해가는 몰락의 역사관과 맞물린 무질서와 퇴보의 자연관이었지만, 중세 후반 들어 십자군 원정을 통해 아랍권에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등 그리스로마의 저작들이 유입되고 농업혁명을 통해 자연의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자연 안에는 창조주의 창조원리로서의 디자인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보다 우세해졌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현상들 속에 감춰진 창조주의 원리를 찾아 보여주는 일, 그것이 과학자들의 활동으로서의 디자인이었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우선 신학과 과학의 접점, 통섭의 지점을 보여주는 개념이었다.

 


조르조 바사리   /   <미술가열전>

이러한 디자인 개념을 미술에 접목시킨 것은 <미술가 열전>(1550)을 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였다. 이 책에서 그는 과학자들의 디자인 활동을 1) 조형 원리(이데아)의 파악, 2) 그것의 시각화(드로잉)로 규정한 후, 과학자 말고도 이러한 디자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화가, 조각가, 건축가를 꼽았다. 그들도 이 세계의 조형 원리를 파악하며, 그것을 드로잉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말이 되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활동은 디자인 활동으로 규정되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정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술’(Belle Arti)이라는 개념을 창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미술 개념

이 사실상 디자인 개념이었음은 1563년 피렌체에서 문을 연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의 정식 명칭이 ‘Accademia del Disegno’였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입증해준다. 디자인은 신학-과학-미술을 잇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융합의 키워드였던 셈이다.

 


정수경

글쓴이_ 정수경 (미술이론학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이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또 무엇이면 좋을지에 대해 미술현장과 이론을 오가며 고민하고 있으며, 고민의 결과를 글과 강의로 풀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에는 국내의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 Comments
  • author avatar
    yerim4479 2013년 11월 05일 at 10:44 PM

    ‘융합’과 ‘통섭’이 원래는 편재되어 있었다는것이 새롭네요. 원래는 현 시대와서 강조하는 줄 알았는데. 19세기에 분리되었더라. 그리고 ‘미술’이 이데아를 파악하고 그것을 시각화 하는 것. 이데아 파악을 위한 수학,천문학,해부학등의 학문을 섭렵하고, 원근법등을 고안해냈다는것. 우와!!! 역시 아는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인간의 ‘사고’가 담긴다는것이, 결국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해낸다는 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1 Comments
  • author avatar
    yerim4479 2013년 11월 05일 at 10:44 PM

    ‘융합’과 ‘통섭’이 원래는 편재되어 있었다는것이 새롭네요. 원래는 현 시대와서 강조하는 줄 알았는데. 19세기에 분리되었더라. 그리고 ‘미술’이 이데아를 파악하고 그것을 시각화 하는 것. 이데아 파악을 위한 수학,천문학,해부학등의 학문을 섭렵하고, 원근법등을 고안해냈다는것. 우와!!! 역시 아는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인간의 ‘사고’가 담긴다는것이, 결국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해낸다는 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비밀번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