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365 도서 철학자의 여행법

여행을 가려거든 연인 말고 친구와 가거라

미셸 옹프레 저 | 강현주 역
세상의 모든 길들 | 2013.03.15

 

미셸 옹프레가 쓴 <철학자의 여행법>의 원제는 ‘theorie of voyage’, 그러니까 ‘여행의 이론’쯤 되겠다. 여행기니 가이드북이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론’은 처음이다. 백번 양보해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까지는 인정하더라도 여행에 대해 무슨 ‘이론’이 필요하단 말인가. 목적지를 정하고, 일정을 예약하고, 짐을 꾸리고, 여행지를 방문하는 그 단순한 일에 무슨 이론적 고찰이 개입될 수 있나. 흠,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전 국민의 애독서가 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이 “알아야 보인다”며 ‘인문주의 여행’의 길을 터놓았을 때, 우리에게 여행은 길 위에 스민 삶의 무늬[人文]를 이해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여행이라는 자신의 행위와 결과를 비춰보는 준거로서 ‘여행의 이론’도 성립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 책은 ‘인트라다’로 시작해 ‘코다’로 끝을 맺는데, 여행이 오페라의 전개와 마찬가지로 서곡과 격렬한 종지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행의 서곡은 ‘갈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뼛속 깊이 유목민의 기질”을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도리 없이 때가 되면 여행을 갈망하게 되고 짐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방콕’은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을 위배하는 부자연스러운 짓. 이동에 대한 열망, 변화에 대한 열정, 움직임에 대한 욕구, 자유에 대한 숭배, 돌발 행위에 대한 욕망, 이 모든 것들이 여행자들의 유전자 안에 있다. 여행자들의 예수는 “나는 어디에서도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도시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성문을 떠나는 영원한 출발자이다”라고 말한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다.

 

여행의 욕망이 생물학적 본성인 것처럼 실제 여행의 주체도 우리가 아니다. 무슨 얘기인가. 우리가 여행의 목적지를 선택하는 게 아니고 그 장소에 의해 우리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지도에서 읽을 수 있는 어떤 단어, 이름, 장소, 지역이 갑자기 우리의 주목을 확 끌어당기는 순간”이 있고, 우리는 그에 이끌려 결국 그곳을 여행지로 선택한다는 얘기다. 이 판단의 리얼리즘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내게 한때 그것은 모로코의 ‘탕헤르’였고, 스페인의 ‘아랑후에스’였으며, 런던의 ‘블룸즈버리’였으니, 내 기어이 이곳들을 가고 말리라) 여기에 목적지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풀려 주는 것은 독서다. 그 책은 여행 가이드북이 아니다. 추천하건대,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줄게’라거나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중국과 일본’ 같은 책쯤 되겠다. 이럴 때 “우리가 욕망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 역시 우리를 만들게 된다.”

 

이 철학자의 여행에 대한 권고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부분은 연인과 여행하지 말고 ‘친구’와 여행하라는 대목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두 이성간의 사랑은 위험해지거나 깨지기 쉽다. 낯선 남자(여자)와의 자유로운 교류를 방해하고, 상대에 대한 ‘의무’로 인해 여행의 자발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반면 “시간과 공간, 열정을 함께 쓰는 동안 우정은 견고해지고, 한 사람의 피로는 다른 사람의 지구력을 강화시켜 주고, 한 사람의 부족함은 다른 사람의 풍족함으로 채워진다.” 그래, ‘신혼여행’은 여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비로소 갖게 된 둘만의 시간과 공간일 따름이고, 부부끼리의 여행에서 아옹다옹하는 커플이 숱하게 많았으니, 이 역시 여행의 리얼리즘에 해당될 수 있겠다.

 

이 철학자는 이밖에도 여행에 대한 다채로운 통찰들을 풀어놓고 있다. 사하라 사막의 일출시에 뜨는 오렌지색과 중세 도시의 그늘진 골목길을 보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거닐었던 시칠리아 사원의 오돌토돌한 바위를 만지는 것과 같은 ‘감각의 확장’이라는 것,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세계주의자가 되는 경험이라는 것, 비행기 여행을 통해 우리가 위대한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파스칼의 전언을 실감케 하는 순간) 등이 그러하다. 이 점에서 옹프레는 느림 혹은 걷기의 예찬론자가 아니라 글로벌한 세계를 긍정하는 기술 예찬론자이다. 그에게 노트북과 스마트폰은 여행의 방해자가 아니라 새로운 여행 경험을 제공해주는 기술적 조건이다.

 

이 책은 여행 계획을 세우기 한참 전에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행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지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행은 우리 안에 있던 상처와 고통, 권태와 번민, 아픔과 불행, 슬픔과 우울을 깊이 들여다보는 ‘에고티즘’(자아주의)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거칠게 말해 ‘자존감의 회복’을 위한 여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먹고사니즘’이 지배하는 자존감 제로의 시대에 확실히 여행을 가긴 가야겠다, 그런데 아무래도 앞의 권고가 맘에 걸린다. 마누라와 애를 빼고 친구랑 여행을 가는 게 좋겠다고? 어허, 옹프레 선생, 그건 아무래도 애 딸린 사십대 유부남에게는 불감청고소원이나 그 후과가 매우 두려우니, 그대의 권고사항에서 삭제요!

 

글 ㅣ 김재환(문화체육관광부 온라인소통과장)
“퇴근 후 마음 편히 책이나 볼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