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애국가’를 먼저 감상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이전의 일이었는데, 헐리웃영화를 보든 성인영화를 보든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관람객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애국가’ 앞에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해질녘 태극기를 내릴 때,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올려야 했던 것도 마찬가지. 행여 좋은 의도였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경험을 주지는 못한 제도였다. 개인 양심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도록 강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

1970년대, 서울시청앞 국기 하기식 풍경 [출처: 경향신문]

 

아직도 우리는 스포츠 경기 시작 전이나 각종 민간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른바 선진국으로 표상되는 나라들과는 꽤 차이가 있는 풍습이다. 유럽의 여느 나라를 가보더라도 국가적 상징을 우리나라만큼 자주 접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19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던 제국주의 침략의 주인공들인 바, 거꾸로 우리나라처럼 침략국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 국가들에게는 ‘애국가’와 같은 민족적, 국가적 상징에 대해 각별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사적 경험 까닭에 삼일절의 3월, 현충일의 6월 혹은 광복절의 8월이 오면 태극기, 무궁화 등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이런저런 행사가 뒤따르곤 하는 것일 게다.

 

우리나라 정부와 독립기념관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매년 관련 경시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런데 출품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애국가 부를 때 진짜 짜증’이 났다거나 하는 종류의 이야기가 의외로 많다. 세대 차이와 관계없이 매우 공감이 가는 글들도 많은데, 예컨대 이런 경우다. “아침 조회 시간 애국가 부를 때면 / 우리반 친구들은 장난을 쳐요 / 아침 조회가 끝날 때까지 / 애국가 부르는 친구는 아무도 없어요.” 누구든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이 어린 학생의 마음과 공감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애국 조회

1970년대, 눈 오는 날 국민학교 애국조회 풍경 [출처: 경향신문]

 

강제적으로 습득을 요구하며 그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할 경우 징벌이 뒤따르는 방식의 교육이라면 그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문제는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오래도록 그처럼 강제 주입식으로 교육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음악적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정작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돌아보고, 그것의 미덕을 나누고자 하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에는 딱히 함께 부르고 감상할 만한 음악을 떠올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하다면 대안적 차원에서, ‘고유명사 애국가’ 대신 ‘대명사로서의 애국가’로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방법은 어떨까 싶다. 그렇게 하면 향유할 만한 애국가들을 조금 쉽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안익태의 작품으로 애국가를 국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사실 많은 애국가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할 만한 것으로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기 전인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국가로 정해졌던 ‘대한제국 애국가’를 꼽을 수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기 전까지 대한제국의 공식국가였던 노래다. 안익태의 ‘애국가’보다 훨씬 먼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널리 애창되었던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선율의 애국가도 있다. 올드랭사인 애국가의 경우라면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와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일제에 맞선 독립투쟁에 함께 했던 독립군가들은 또 어떤가. 아마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기에 이보다 적절한 노래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대한제국 애국가 올드랭사인
[좌]1902년 공표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의 표지   [우]’올드랭사인’ 애국가. 1914년 광성중학교 발행 <최신창가집>에 수록

 

조금 더 시각을 확장하면 <고향의 봄>이나 <아리랑>, 나아가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도 애국가로서 향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민주화를 향한 격동의 광장에서 나라의 미래를 뜨겁게 걱정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국가’와 함께 가장 널리 애창되었던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명멸하는 세상의 허다한 노래 가운데 시간을 초월하여 공동체의 기억으로, 시대의 정전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몇 안 되는 노래들이 바로 이 노래들이다. 물론 그러한 맥락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안익태의 ‘애국가’가 등장하게 마련이었는데, 이런 역사성을 마음에 새겨 다시 불러본다면 아침 조회 시간에 억지로 불러야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애국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애국 혹은 애국가를 특정한 표현으로 국한하여 박제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채로운 노래와 개성 넘치는 현대인들 저마다의 마음을 나라 사랑의 맥락에서 융화시켜낼 수 있다. 그를 통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성숙과 발전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들은 함께 모여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마다의 소중한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면 우리가 함께 소원하는바가 이루어지지 못할 까닭이 없다.

 
 

김병오 음악학자

글 | 김병오 (음악학자)

전주대학교 연구교수, 라디오 관악FM 이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음악사를 전공했다.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OST 작업 및 포크 음악을 토대로 전통음악과의 퓨전을 추구하는 창작 작업을 병행해왔다. 지은 책으로는 『소리의 문화사』가 있고, 「한국의 첫 음반 1907」, 「화평정대」, 「바닥소리 1집」 등 국악 음반 제작에 엔지니어 및 프로듀서로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