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잠든 늦은 밤, 혼자 거실의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포털의 뉴스를 뒤적이다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번갈아 보며 그 속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몇몇에게는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고, 유용한 정보는 관심글로 체크하고, 누군가 던진 무거운 이야기에 생각을 이어가다가 우스운 사진과 설명글에 빵 터져 웃는다. 내 웃음 소리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고개를 드니 나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많은 이들과 어디엔가 같이 있는 듯 했는데 그게 아니다.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 내가 지금 있는 장소, 공간은 이 곳이다.

 

엘리베이터의 개발은 고층빌딩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확장시켰다. 1층에서 몇 발자국 옮겨 버튼을 누르고 조금만 기다리면 전혀 다른 공간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야 당연하고 익숙해진 것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어있던 상자 속에서 나비 넥타이를 한 토끼가 튀어나오는 것만큼 신기한 일이다. 기술의 발달은 여러 의미에서 공간 경험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PC방에서 오랫동안 게임에 빠져있다 보면 숲을 뛰어다니고,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사람들과 공성전을 펼치는 것이 실재하는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경험하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어두운 pc방 의자보다 모니터 안의 가상의 공간이 더 실체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경험에서 보듯이, 사람의 시간을 얼마나 가져가는가가 미래 비즈니스의 성공의 잣대라 한다. 한 사람의 시간은 유한하고, 그 시간을 얼마나 점유하는가가 중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무언가에 빠져있을 때, 그 시간 동안만큼 발을 딛고 서 있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지각이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상공간에 기반한 비즈니스에서는 개인의 시간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공간적 위치감을 얼마나 흐리게 하느냐, 또는 물리적 한계를 얼마나 초월하느냐가 이슈가 된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사람들과 SNS로 소식을 주고 받는 요즘, 한 가족이 모여 앉은 외식 자리에서조차 다들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 이런 질문이 생겨날 만도 하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런 현상을 볼 때 ‘장소’, ‘공간’, 즉 물리적 환경을 다루는 건축은 참으로 답답한 영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가상의 세계를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동안도, 의식의 그릇인 볼품없는 몸뚱아리는 실제 세계 어딘가에 놓아두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몸의 진화 속도가 기술의 진화를 따라가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물리적 장소에 대해 느끼는 정서적 연결고리는 존재하고, 비물리적 사회관계가 깊어지면 그만큼의 허망함도 커지는 반작용 또한 느끼기 마련이다. 다양한 사회적 접촉의 방법이 생겨나도 그 방법들간의 위계는 존재하며, 그 중 가장 상위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얼굴을 맞대는 것이다. 실제로 눈빛을 보고, 손을 잡아본 사람이 관계 피라미드의 우선 순위에 등재된다. 실제로 만나려면 장소와 공간이 필요해진다. 어떤 장소와 공간이냐에 따라 만남의 모습이 좌우되기도 한다.

 

사무실에 손님이 오면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일하는 공간으로 들어서기 전에 제법 트인 공간이 있고 이 곳을 우리는 ‘커튼홀’이라 부르는데, 여기엔 녹색 커튼으로 둘러칠 수 있는 회의용 긴 테이블과 콘크리트 블럭을 쌓고 나무상판을 올린 간단한 Bar가 있다. 손님이 두세 명 미만일 경우 회의용 테이블 보다는 바 쪽으로 인도해서 커피를 내리며 이야기를 한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른 친구이건, 프로젝트 회의를 위해 만난 건축주이건 간에 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조금 더 공기가 편하게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 내게 다른 일을 맡겼던 건축주가 다시 찾아와 자신의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다며 인테리어 디자인을 부탁해왔다. 필요한 요구사항을 말하면서 ‘커튼홀’과 같은 공간을 꼭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공간 자체의 생김새가 아름답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바가 있음으로 만들어내는 ‘장소’의 특정한 느낌, 그 곳에서 만들어지는 사람들간의 만남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일 것이다. 장소의 힘이다.

 

나는 여전히 떠나는 손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언제든 지나다가 커피 한잔 하러 오세요.”

 

 

 

글 | 건축가 구승회

연세대학교와 Columbia University 건축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 창조건축과 Yamasaki Associates, Inc, 야마사키코리아건축사사무소를 거쳐 현재 (주)크래프트 대표 재직 중.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이며 즐겁게 일하는 것과 행복하게 노는 것에 많이 노력 중. 중소 규모의 일상적 건축을 주로 하고 있으며 근작으로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의 집’, 서래 공방, 한남동 657 빌딩, 신사동 589 빌딩, 동해 주택과 양평 주택 등이 있다. 최근 영화의 흥행에 기대어 일상적 건축에 대한 책 ‘건축학개론_기억의 공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