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어릴 때 TV에 나오는 기타 치는 장면을 보고 기타를 사 달라고 졸랐다. 자기도 TV속의 연주자처럼 폼을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도 기타를 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말문 겨우 뗀 아이가 기타를 어떻게 기타를 칠까 싶어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래도 딸아이는 지치지 않고 기타 타령을 했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기타를 만들기(?)로 했다. 집에 있던 우유곽을 붙이고 잘라서 기타 모양을 내 시트지로 전체 모양을 고정하고, 공명통을 뚫은 뒤에 줄을 매달아서 그럴듯한 기타를 만들어 주었다. 딸아이에게 종이 기타가 소리를 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기타를 연주한다고 좋아했고 또 나더러 연주를 들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왠 종이 기타 얘기일까 궁금할 것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동양의 음양 이야기를 보면 무현금(無絃琴), 즉 ‘줄 없는 거문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음악의 지식이 있건 없건 줄 없는 거문고는 악기가 될 수가 없다. 무현금은 악기가 될 수 없으니 자연히 음악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이 상식적일 뿐만 아니라 의심을 제기할 필요가 없이 옳다.

 

동양의 음악사를 보면 줄곧 ‘줄 없는 거문고’가 일종의 최고 음악적 경지 또는 음악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이고 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고 또 일어날 수 있었을까? 공자는 음악의 조성에 따라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구분하고 후자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자까지만 해도 음악하면 악공이 악기를 사용해서 내는 소리로 생각했다. 하지만 노자의 ‘대음희성(大音希聲)’과 장자의 ‘천뢰(天籟)’와 ‘함지’ 악론 이후로 음악의 전제가 기본적으로 뒤흔들리게 되었다.

 

노자와 장자는 기존의 음악이 아무리 최고의 음악적 표현을 해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현악기이든 타악기이든 악기는 재질, 구조, 연주법을 벗어날 수 없다. 징이 큰 쇳소리를 내지만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의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듯한 애절한 소리를 낼 수는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연주가가 솜씨가 뛰어나고 악기가 잘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한 악기로는 그 악기로 낼 수 있는 소리 이상을 낼 수가 없다.

 

도공이 가마에 구워낸 그릇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이게 아냐!”하면서 망치로 그릇을 깨버리듯이 우리는 어떤 악기 소리를 들어도 한 악기를 통해서 듣고 싶은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사람들은 도대체 “소리는 어디에서 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공자는 당연히 “소리는 악기에서 난다”라고 생각했고, 노자와 장자는 이러한 공자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음희성’과 ‘천뢰’ 이야기는 소리는 어디에서 기원을 하는 것이며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새롭게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공자 이후로 순자와 『예기』 「악기樂記」의 지은이는 소리가 기본적으로 악기에서 난다는 공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악기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의식) 흐름과 이어져있다는 통찰을 하게 되었다. 연주자는 사람의 마음 흐름을 읽고서 그것을 악기로 옮겨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로부터 심금心琴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또 지음知音의 고사도 단순히 청음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완전한 소통을 나타내는 것이다.

 

줄 없는 거문고는 마음-악기-소리의 연관성에 마음의 음악성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음악은 소리와 악기가 아니라 모든 악기와 소리를 담고 있는 마음 자체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현금, 즉 악기가 제 모양을 갖추지 않아 물리적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마음에서 모든 음악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상태가 최고의 음악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원시인으로 알려진 도연명(365~427)은 “음률을 몰랐지만 줄 없는 금을 늘 곁에 두고서 술이 적당하게 되면 금을 어루만지며 제 마음의 소리를 읊었다(淵明不解音律, 以畜無絃琴一張, 每酒適, 輒撫弄以寄其意. 蕭統, 「도연명전」)”라고 한다.

 

조선시대 서경덕도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기는 글(無絃琴銘)〉을 지었다. “거문고는 있지만 줄이 없으니 몸을 남겨주고 쓰임을 없앴네, 참으로 또 다른 쓰임을 없앤 게 아니니 고요함 속에 온갖 움직임을 담고 있네. … 거문고의 줄을 쓰지 않지만 그 줄을 줄 노릇하게 하네, 음율 밖의 소리에서 나는 거문고의 본래음을 듣네.” 경지야 같을 수 없지만 딸아이의 종이 기타 연주랑 도연명과 서경덕의 무현금 듣기는 닮은 바가 적지 않을 듯하다.

 

 


이경윤, 무현금을 그린 「월하탄금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글 | 동양철학자 신정근

동양철학에서 문화예술교육의 메시지를 찾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한제국의 금고문 논쟁을 주제로 석사를, 인(仁) 개념의 형성 과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시대와 사회의 맥락에서 철학과 예술 미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다양한 연구 성과로 밝혀내고 있다. 요즘 현대 철학없는 동양 철학의 문제를 새롭게 풀어내려고 하면서 동양철학 텍스트의 재해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울러 철학 사상 위주의 동양학을 예술 미학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긴 준비기간을 보내고 있다.